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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벙분청사기는 자유로운 맛을 작품에서 느낄 수 있어야 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한 것 같지만 난이도가 높은 제작기술이 요구되는 기법이라 이것을 완성시키는 도예가는 극히 드문 도예기법이다. 젊은 송기진 도예가가 보성덤벙이 재현을 완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견스러운 일이다.”
<무형문화재 陶泉 천한봉 선생>
“도예가 송기진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보성백토분장사발은 400년 만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나선화 교수>
“송기진은 ‘보성덤벙이’가 ‘업’이라고 했다. 그 그릇을 만나고, 만들게 되고, 대학 선생 자리를 포기하게 되고, 가난 속에서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된 ‘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일에 바빠 하루를 거의 보냈다 해도 나머지 짧은 시간이라도 빠짐없이 물레를 돌리는 것이 자신에게는 무엇보다고 중요한 일이어서 습관이 되었다했다. 그릇을 만드는 것은 도 닦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고, 그래서 실은 돈하고도 관계가 없다고도 하였다. 답답하고 어려울 때면 산천경계의 제신들에게 기원하고 기도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그가 그와 그의 식구들의 운명까지를 걸었기 때문에 ‘보성 덤벙이’는 그런 다정한 남도의 흰 빛을 600년 만에 다시 송기진에게 나타내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 의사 나해철 선생>
설해(雪海),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이순(耳順),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지천명(知天命),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天地心 15세기 초벌덤벙분장 제작기법 12번
만월(滿月),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와온(臥溫),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태백(太白)
天空心, 보성덤벙이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 2015년
이순(耳順) 굽면
그릇 하나 만드는 데 한 달 걸려
“덤벙이는 분청사기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분청사기는 청자와 달리 쉽게 만들어졌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산허리나 논바닥에 흙이 점질만 있으면 된다 이겁니다. 기와를 만들 때도 쓰죠. 보성덤벙이가 유명한 것은 그 바탕색이 검기 때문이에요. 덤벙이가 만들어진 곳의 산 전체가 맥반석으로 이뤄져 있어요. 도촌리에는 지금도 맥반석 광산이 있어 침대도 만들고 그래요. 맥반석에 철분이 많아 특히 검습니다. 보성 일대의 흙이 일반적으로 철분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도촌리 것이 특히 많죠.”
송씨는 도자기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남다르게 했다. 보통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복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송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몇백 년을 해왔음에도 못해내는 것을 보면 잘못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현하고 싶은 작품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들여다보고 느낌부터 챙긴 뒤 그 느낌을 살려내는 방식을 택했다.
맨 처음 매달렸던 기자에몬 이도의 경우 한 달 동안 들여다보면서 느낀 것은 자유와 편안함이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자유스러움을 주는 그릇을 만들려면 스스로 내 마음부터 자유스러워지고 편안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마음공부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사발이 자장면 그릇만해지기도 하고, 손자국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를 거듭하면서 이 또한 자의식이 들어간 작위(作爲)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다시 여느 사발을 닮은 작품이 빚어졌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제야 칭찬이 쏟아졌다.
“2006년 광주에서 ‘보성덤벙이연구발표전’을 할 때 다른 사람한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고현 조기정 선생님(지난해 작고)께서 오셨는데 부축한 제자에게 제 작품을 들어보라고 하시고는 ‘이 정도면 경지에 오른 것’이라고 말씀하셨대요. 고현 선생님은 도천·원당 선생님과 함께 제게는 대선배이자 큰 스승님으로 청자 연구의 선구자이십니다.”
지난 5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송씨의 작업장에 느닷없이 일본인 두 명이 한국인 안내인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40여 년 동안 고려다완 재현에 매달려온 도예가 다나카 사치로와 오사카(大阪)의 유명한 도자기 전문 갤러리인 구로다도엔(黑田陶院)의 구로다 구사오미 회장이었다.
작업장을 둘러보던 다나카가 함박웃음을 짓더니 이내 엄지를 치켜세우며 “코리아 넘버원”을 외치자 안내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도요지 답사차 내한해 유명 요장들을 둘러보면서도 덤덤해하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구로다도엔은 ‘고비키’ 전문 컬렉터만 해도 수천 명을 관리하는 갤러리다.
하지만 송씨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보성덤벙이의 제작기법은 100% 되찾아냈다고 자신하지만, 작품은 옛날 선조들 솜씨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기법은 되나 최고의 미에는 한참 떨어집니다. 숙련된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분업과 조기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기막에 들어가면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사기막에 들어가 최고의 장인들이 하는 것을 분야별로 일일이 보고 배워 그 분야의 최고의 장인이 되고, 어른이 돼서는 또다시 자식대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기술을 전수했죠. 그런데 지금은 고작 몇 년 하고 장인입네 하는 판이니 그런 최고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대물림 시스템이 임진왜란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본의 국보나 대명물이 된 것들의 대부분이 임란 이전 작품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몇 백 년 동안 명품 조선사발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족탈불급인 것이 바로 그 때문이죠. 하물며 고작 몇 십 년밖에 안 된 우리나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옛 작품을 흉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깊이와 맛은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송씨는 “조선사발, 그 중에서도 덤벙이는 자연을 닮았다”고 말한다. 옛 선조들은 주위에 있는 자연을 퍼다 그저 그릇을 만들었을 뿐, 이러저러한 그릇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봐도 질리지 않으면서 간단히 베낄 수 없다는 분석이다. 그런데도 이런 ‘보물’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는 분노한다.
“일본 전시 때였어요. 도쿄대 예술과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와 보면서 ‘조선사람들은 참 무식하다. 조선사발의 가치를 모르고 막사발로 썼다. 우리가 차를 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해 국보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국보로 받드는 조선사발을 만든 사람들을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느냐? 그런 수준의 작품이 나오려면 그만한 수준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함부로 말하면 되는가? 다만 그것을 향유하는 층이 조선에서는 서민층이었고, 너희는 그런 도자기문화가 없었음에도 지배계층이 그것을 향유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아니냐? 그러고는 일본에서 제일 그릇을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더니 가토 도쿠로라는 이름을 대요. 그러면서 생전에 한 해에 딱 네 작품만 파는데 작품 한 점에 1억원씩 받고 팔았다고 하기에 작품집을 보니 그 사람이 재현했다는 작품보다 내 작품이 더 낫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1억원씩 붙여버렸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 도공의 후예로서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송씨는 이듬해 코엑스 전시에서도 사발 하나에 3000만원씩 가격표를 붙였다. 덤벙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송 아무개의 작품은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소문만 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지금껏 작품을 제대로 팔아본 적이 없다.
팔려고 작품을 한 적도 없고, 파는 데 익숙하지도 않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작업은 물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많다. 하지만 장삿속으로 싸구려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조선사발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보성덤벙이를 주로 하는 이는 없습니다. 다른 그릇에 비해 손도 몇 배 더 타는 데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죠. 다른 도자기들은 가마에서 나오는 순간 우선 예쁩니다. 첫 눈에 뻑 가죠. 그런데 덤벙이는 무덤덤한 것이 끄는 맛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선뜻 비싼 돈을 내고 사겠어요? 덤벙이는 쓰면서 완성되는 도자기예요. 쓰는 사람의 공력에 따라 진화하죠. 기물이 약해 함부로 쓸 수도 없어요. 고수라야 볼 줄 알고 사는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송씨는 앞으로도 계속 보성덤벙이를 할 생각이다. 우리의 조그만 사발이 다른 나라에서 국보나 문화재로 위해진다는 자체가 그로 하여금 사명감을 부추기는데다 그동안 여러 번 때려치우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업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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