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緣), 112.2×162.2cm, 2018, Mixed medium.
인연(緣), 112.2×162.2cm, 2013, Mixed medium.
인연(緣), 91×72cm, 2016, Mixed me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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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of artist

인연(緣) artist, Lee hee don

물감과 한지, 그물망 등 미술적 재료를 가지고 인간, 우주, 자연의 무수한 인연을 축조하는 작업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불교에서 찾는다”고 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제 작업은 불교적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 서적도 많이 읽었고요. 특히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글귀가 가장 와 닿아서 이것을 평생 화제(畵題)로 삼았죠.”

_작가 이희돈

생명력이 충만한 ‘날것’의 미학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1990년대 후반에 ‘구멍뚫기((타공/打空)’ 기법을 착상해서 이를 서서히 실험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확실한 자신의 조형언어로 만든 이희돈은 집념의 작가이다. 흔히 그를 단색화(Dansaekhwa) 작가로 오해하기도 하나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스펙트럼은 그보다 훨씬 더 넓다. 그는 단색과 다색을 오가며 작업할 뿐 어떤 구획에 갇히길 거부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경계인이다. 그러나 그는 좌든 우든 정치적 이념의 색채가 분명할 것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적 관습에 저항하는 반항아적 의식을 지닌 경계인이다. 빨강과 파랑의 경우에서 보듯이 색이란 곧 이념의 상징과 표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구분을 체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런 이유에서 볼 때 이희돈은 단색화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색채와 기법의 실험가’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왜냐하면 화단 경력이 어느덧 40여 년에 이른 그의 삶과 예술을 놓고 볼 때, 그의 생애는 곧 이 둘의 실험에 바친 기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색과 기법을 다루는 일이 곧 화가의 작업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나, 이희돈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욱 절실했고 결과적으로 그 일이 일련의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런 호칭이 결코 유별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희돈을 달리 봐야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국내 대학의 어느 파(派)에도 속하지 않는 자수성가형 독학의 화가라는 사실에 있다. 그는 1972년에 군대에서 제대한 뒤, 당시 군소 화실들이 밀집해 있던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가 개인 화실을 전전하며 그림을 배운 사실은 체계적인 미술대학의 정규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대학의 정규 미술교육이 지닌 최대의 장점인 화맥(畵脈)과 인맥(人脈)으로부터 그가 원천봉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70년대의 일반적 화단의 상황을 감안할 때 작가로 활동하기에는 매우 혹독한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무렵 이희돈이 호구지책으로 마련한 일은 화방 운영이었다. 그는 이 일이야말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적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목공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이희돈은 북아현동 꼭대기에 있는 추계예술학교(추계예술대학교의 전신) 근처에 화방을 차렸다. 화방 일은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가면서 한편으로는 틈틈이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지됐다. 이 무렵에 그는 크리스마스 카드 제작과 유명한 시인들의 시화전을 위한 삽화를 그려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했으며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Ⅱ. 
 한국처럼 화맥과 학맥을 둘러싼 파벌이 심한 화단에서 무명의 독학도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지금은 이런 고질적인 관행들이 많이 해체됐지만, 7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화단 실세들의 눈에 들지 않으면 작가로서 성공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희돈이 화방을 경영한 일은 그에게 큰 득이 되었다. 가장 큰 혜택은 화단의 유명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추계예술대학의 조용익 교수를 비롯하여 이왈종,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의 장리석교수와 원로작가인 도상봉, 손응성, 변종하, 정창섭, 손장섭, 창작미술협회의 유경채, 류희영 교수 등은 이 시기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다. 주로 액자를 짜거나 물감의 판매와 같은 일 때문에 인연을 맺었지만, 여러 유명 작가들의 작업실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눈썰미로 익힌 지식과 경험은 정규 대학교육 이상의 실질적 효과가 있었다. 당시 국내의 내로라하는 원로 작가들과 맺은 인연은 성실한 그의 성품으로 인하여 길게 이어졌으며, 평생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작가들과의 이러한 만남은 오늘날 그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돼 주었던 것이다. 
 1974년에 그린 자화상에는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선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는 이희돈의 청년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무렵이면 화방 경영도 어느덧 손에 익어가던 시기였다. 당시 중대 교수로 있던 장리석을 비롯하여 손응성, 도상봉 등 원로작가들과의 친분은 작업 초기에 구상화풍에 경도된 요인이 되었으며, 추계예술학교의 조용익 교수와의 친분은 모더니즘 회화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현재 팔십대 후반의 원로 단색화 작가인 조용익과 작고한 단색화 작가인 정창섭과의 관계는 이희돈의 현재 작품 스타일의 형성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주목된다.  
 이희돈이 당시 추계예술학교 부근에서 화랑을 운영하면서 가장 자주 접한 미술계 인사가 바로 조용익 이었다. 조용익은 50년대 후반에 한국 앵포르멜 미술 운동에 가담한 이후,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형성에 기여한 현대미술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악뛰엘(Actuel) 대표위원(1962), 제 5, 6회 파리 비엔날레 전권대표(1967-9),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1977-1983) 등등의 직함이 말해주듯이, 조용익은 70년대 당시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희돈은 그런 조용익의 작업실을 드나들면서 한창 제작 중이던 단색화를 눈여겨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경험들은 20년이 지난 2000년대에 현재 보는 것과 같은 이희돈의 평면적인 그림들을 탄생시킨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개인의 작품 스타일이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이희돈에게는 옛날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그의 초기 작업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사진으로나마 남아있지 않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은 거의 없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에 의하면 그의 초기 작업들은 어느 날 지하 작업실에 물이 차는 바람에 못쓰게 돼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은 현재 이희돈이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타공기법의 맹아를 보여준다. 달, 산, 사람 등 약간의 구상적 요소를 지닌 이 작품들은 좌우 대칭 등 기하학적 도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타공기법이 낳은 평면적 특징을 뚜렷이 보여준다. 타공에 의한 단색과 다색의 평면화들은 그런 기반에서 창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예술과 삶은 구분되지 않는다. 아니, 다른 어느 분야나 직업의 사람들보다도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은 삶에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에 이르기 쉽다. 이희돈 역시 그랬다. 1999년에 가정적 불행으로 인한 충격과 아픔을 겪은 후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작품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재료를 둘러싼 많은 실험을 했다. 체질적으로 술을 못하니 오직 작품제작에만 몰입해 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천직이 된 화방 업(業)은 재료 공급과 관련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외국 물감회사에서 홍보용 샘플들이 많이 공급돼 제품에 따른 다양한 색채 실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제작됐으나 태작이 많아 그는 이때까지 작업한 작품들 중 대부분을 1톤 트럭으로 3대에 실어 폐기처분했다. 이러한 일련의 힘겨운 과정을 거친 후, 그는 정신적 방황이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돌아 다시 마음을 다잡고 화가(畵架) 앞에 앉을 수 있었다.    
 
Ⅳ.
 70년대에 겪은 이희돈의 모더니즘 회화와 관련된 경험들이 그림에 육화(肉化)돼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비로소 그는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평면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타공기법이 개발된 것은 정신적 방황이 끝난 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2002년 무렵이었다. 
 이희돈에게 있어서 타공기법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자 인식의 도구이다. 삶의 무참한 질곡과 정신적 방황을 겪은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관계의 연속이자 축적으로 다가왔다. 그림은 그런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한(恨)을 해소할 방편이자 수단이었다. 그에게 세계는 수많은 인간들에 의해 짜여진 하나의 피륙, 곧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다라망(因陀羅網) 이었다. 가로 세로로 무수히 교차되는 점들에 해당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인연들과 오욕칠정의 다양한 감정들. 이희돈은 마음 속 구석에서 부단히 솟구치는 갖가지 상념을 잊기 위해서 박스제작용 판지에 무수한 구멍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뚫었다. 그것은 수행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아니, 오래 하다 보니 그런 행위 자체가 곧 수행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무수한 구멍을 뚫는 작업은 곧 행위의 반복에 의한 수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일정하게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반복적으로 흘리거나 칠해 물감층을 형성하는 일이 작업의 요체인 것이다. 약 20여 년간 지속된 이 타공기법은 훗날 개발한 마대천의 제작과 함께 이희돈 회화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 사이에 여러 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형태상의 변화이다. 평평한 화면에 변화를 주기위해 고안된 다양한 패턴들이 등장했다. 단색이 됐든 다색이 됐든 평평한 캔버스 표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타공과 마대실로 짠 천인데, 물감은 그 위에 발라지는 회화적 매체로 작용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몸에 의존한 지난한 작업이다. 반복해서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반복해서 물감을 바르는 행위, 마대실로 날줄과 씨줄을 일일이 반복적으로 교차시켜 구멍이 성긴 마대천을 짜고, 그 위에 특수하게 고안한 물감을 반복해서 바르는 일 등은 모두 몸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들이다. 
 이희돈이 반복적인 손의 움직임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정신적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영역이다. 이것이 1세대 단색화 작가들과 다른 부분이다. 다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단색을 사용할 때조차도 이희돈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최종적인 느낌은 물감이 지닌 물(物)의 ‘즉물성’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이 지닌 일차원적인 감각적 지각과 관련된다. “뽀송뽀송하다”, “거칠다”, “까실까실 하다”, “매끄럽다”, “몽글몽글 하다”, “투박하다”, “푸석푸석 하다”와 같은 어사(語辭)들은 이희돈의 그림을 보고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표현들이다. 그것들은 정신적인 것과는 무관한, 질감의 표현과 관련된 말들이다. 이희돈은 그처럼 무한히 반복된 행위를 하게 된 이유를 가리켜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부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상반된 진술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어떤 정신적 목적지를 향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예술이 행위의 목적인가, 수단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행위자(예술가)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사회적 발화 상황(performative)에 처해 있는가 하는 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타공이나 마대천과 같은 무수히 반복되는 행위의 천편일률적인 결과에 변화를 주기위해 이희돈은 다양한 패턴들을 고안했다. 넓적한 붓으로 넓고 길게 민 붓질의 흔적을 비롯하여 원형, 캔버스의 상부나 하부를 직사각형 형태로 매끈하게 다진 뒤 빗금으로 드로잉한 작품들 등등의 패턴들은 특정한 시기를 정하지 않고 불규칙적인 주기를 띠며 출현한다. 이러한 형식적 변화의 특징은 이희돈이 패턴의 논리적 전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희돈은 자신의 작업에 더욱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재료를 개발하고 특허를 얻었다. 2015년에 등록을 마친 이 특허는 특수한 물감의 재료이다. 그는 닥(楮)의 원료를 빻아서 이를 물에 탄 후 물감과 섞어 다양한 색깔의 종이죽을 제작해 사용한다. 섬유질이 다량 함유된 이 재료는 타공한 평면이나 수제로 짠 거친 마대 천에 붓으로 칠할 때 사용한다. 캔버스 위를 붓이 스칠 때 속도를 빨리 하면 물감의 섬유(실)가 길고 두꺼운 반면, 느리게 하면 짧게 나오는 속성이 있어서 다양한 표현을 할 수가 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수 십 차례에 걸쳐 가로 세로로 붓질을 반복한다. 물감은 같은 색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색상이 될 수도 있어서 세부를 살펴보면 미묘한 색상의 조합과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어서 이희돈은 마대천 작업에서 캔버스 표면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두껍게 늘어진 실 작업에 몰두해 있다. 밖을 향해 풍성하게 늘어진 마대의 실타래는 물감으로 범벅이 돼 더욱 더 풍부한 물성을 느끼게 해 준다. 오방색을 비롯한 순도 높은 원색을 사각형 형태로 엄격하게 구획한 면들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도 최근 들어서 이희돈이 부쩍 신경을 쓰는 작품 경향이다. 이러한 실험은 입체로도 이어져 타공기법에 의한 원통형이나 직육면체 등등다양한 형태의 입체 작업이 다채롭게 실험되고 있다. 
 
Ⅴ.
 이희돈은 높은 강도의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투여되는 시간에 비례하여 밀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선언적’으로 드러내 놓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개념적이기 보다는 육감적으로 느껴진다. 때로 야해 보이기까지 하는 원색은 수준 높은 미적 취향의 위험한 경계치에 도달할 때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민화의 생명력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날 것’의 맛이다. 생짜의 날 것이 주는 육질의 질긴 생명력이 그곳에 충만해 있다. 푹 익어 곰삭은 데서 오는 고상한 맛이 아니라, 분출하는 생명력이 팔팔하게 느껴지는 ‘날 것’의 미학, 그것이 바로 이희돈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색채의 저항, 형태의 저항에 뿌리박고 있으며, 다른 것과 비슷하지만 허를 찌르는 위트와 역설을 담고 있기도 하다.